은유로서의 질병 / 페스트
질병을 이야기하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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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란 다른 존재에 귀속된 이름을 가져와 부여하는 행위로 구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올해 나는 예상치 못하게 여러 번 수술을 받았다. 비어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는데, 그럴 때마다 '건강이 내가 착하게 살아서 받은 상이 아니듯 아픈 것 또한 해부-생리학적 이유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주 상기해야 했다.
안과 수술이라 일시적으로 시력이 많이 저하되어 팟캐스트나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그 때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 강연 녹취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다들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우상화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수전 손택이 그렇다. 그냥 너무 멋있다. 그래서 이 강연을 환자 입장에서 들으며 보내는 시간이 꽤 나쁘지 않았다.
다루는 내용 또한 좋은 환기가 되었다. 우리가 은연중에 질병에 부여한 평판이나 함의, 또 질병 외에도 이 시대에 특수한 맥락을 가지는 대상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쉽게 말하면, '2000년대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백혈병이나 기억상실증에 많이 걸렸는가?'의 근대 유럽-북미 버전 사회문화적 고찰이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다룬 질병은 결핵과 암이다. 둘 다 유병률이 높고 세계 인구의 사망 원인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질병이었다. 지금도 그 사실은 크게 변함이 없다. 그러나 문학이나 매체에서 다뤘던 방식, 사회에서 받아들인 방식이 매우 달랐다.
1970년대의 내용이라 지금의 기준으로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싶은 부분이 많다. 우선, 그 당시 의학적 수준에 의해 질병에 대한 이해가 한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손택 또한 '질병에 대한 이해가 발전함에 따라 해당 질병이 내포하는 은유 또한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근래 미디어에서 많이 다루는 질환(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자폐 스펙트럼 등이 떠오른다)에 대한 이해가 근시일 내에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면, 이전의 콘텐츠들은 굉장히 낡고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특정 시기에 대두되는 질병이 그 시대에서 많은 주목을 받는 가치와 어떤 식으로든 결부되는 지점이 생겼을 때 은유가 더 강력해진다.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던 시기 결핵은 생활환경과 연관지어졌고, 2차대전 후 근-현대에 암은 고독이나 억압의 이미지를 그림자처럼 달고 다녔다.
그럼 앞서 언급한 백혈병이나 기억상실의 경우, 어떤 특성으로 인해 강한 은유적 상징을 갖게 되었을까. 어릴 때 보았던 드라마들을 떠올리며 정리해 보았다.
순수(purity) - 병명에 포함된 '희다'와 '피'의 이미지로부터
순수(innocence) - 중요한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갖는 면책 특권
필멸의 비극 - 불치병이라는 인식에 의해
리셋 - 인간관계에서 쌓인 레거시를 청산할 기회
헌신 또는 화해 - 치료법 중 하나인 조혈모세포 기증이 갖는 극적 역할
진실의 시간 - 거짓이나 위선을 바로잡는 기회
정리하고 보니, 문화 콘텐츠에서 질병을 은유로 소비하는 것은 지양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이 더 발달한 현대에는 질병이 가진 은유가 변하고 퇴색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코로나19가 좋은 예다. 초기의 코로나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 '외부인'이나 '무책임한 여행객' 또는 특정한 종교와 강하게 연관되었다. 이전의 독점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파괴력이 약해진 지금 코로나에 대한 이와 같은 내러티브는 힘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에 대한 은유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인류는 질병을 '정복'하는 것 만큼이나 새로운 질병들을 빠르게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더 적게 자고, 덜 움직이고, 더 오래 살면서도 전보다 더 월등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건강하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질병의 실질적 종말이 온다 해도 관념적 종말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병'은 나도 흔하게 가져다 붙이는 접미어고(월요병, 관심병), '앓는다'는 표현도 여러 맥락에서 사용한다. 왜 이렇게 만연할까.
질병에 대한 은유는 한 시대나 개인이 가진 관점의 강렬함을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암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빠르게 확산'되는 것과 '역병처럼 퍼지는' 것은 매우 다르다. 화자의 입장에서 질병에 대한 은유는 너무나 매력적인 도구다. 우리가 가진 질병에 대한 본능적 공포와 거부감을 손쉽게 가져다 쓸 수 있으니까.
질병의 기전을 이해하면 질병에 대한 은유의 힘이 약해지듯, 질병에 대한 은유를 이해하면 그러한 관념의 지배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위에 링크한 강연에서도 파악할 수 있지만, 손택이 쓴 책의 진가는 사고를 전개하는 탁월한 방식, 함께 제시하는 아름다운 레퍼런스의 향연,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구성된 방식에 있다. 그러니까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페스트>는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여러 번 빌려 읽었다. 많이 좋아하는 책이고, 좋아하는 이유도 많다. 판데믹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카뮈가 지하에서 깨어나서 <페스트>를 다시 써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좋아하는 이유를 다 설명하면 너무 길어질테니, 4가지만 정리했다.
사실 카뮈는 지하에서 계속 편히 쉬어도 된다. 다시 깨어날 필요가 없다. 그가 <페스트>를 통해 한 이야기는 판데믹을 겪어온 현대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스트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도시가 폐쇄된 직후 시민들의 이야기는 2020년의 내가 느낀 감정과 다르지 않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 같은 것이다. ...(중략)...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었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위드코로나'가 연상되는 대목도 있다.
겁은 났지만 절망은 하지 않았으며, 페스트가 그들의 생활의 형태처럼 보이게까지 되고 또 그때까지 영유할 수 있었던 생활방식 자체를 잊어버리게까지 되는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판데믹이 장기화되었을 때 굉장히 사소한 것에 몰두하던 우리의 모습도 재발견할 수 있다. 이런저런 챌린지가 유행한다거나, 어떤 산업이나 사업이 반짝 타올랐다가 식어버린다거나, 온갖 음모론이 소셜미디어를 휩쓴다거나 하는 모습들. <페스트>의 시대에는 날씨에 일희일비하는 사람들이 그려졌다.
그 전반적인 포기 상태는 결국에 가서는 사람들의 성격을 단련시킬 수도 있으련만 오히려 사람들을 줏대 없게 만들어놓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몇몇 시민들은 해가 나거나 비가 오면 그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또 하나의 노예 상태에 빠져버렸다. 즉, 그들은 까닭 없이 괴로워하거나 까닭 없이 희망을 품는 것이었다.
질병 통계에 대한 대목도 있다.
또 한편, 여느 때 그 도시에서 한 주에 몇 사람이 사망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중략)... 그것은 뚜렷한 이해관계가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려고 관심을 기울이는 법이 없는, 바로 그런 성질의 것이다. 대중들은 말하자면 비교의 기준치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통계치가 그럴 것이다. 인구 밀도라던가 치사율이라던가 하는 수치를 하나만 제시한다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동일 집단에서 시계열로 비교하거나, 같은 시기에 다른 집단과 비교하고 맥락을 설명해야 의미가 겨우 전달된다.
시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페스트의 유행을 선언한 시점인 2부의 첫 챕터는 <페스트>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 아래 단락이다.
이처럼, 페스트가 우리 시민들에게 가장 먼저 가져다 준 것은 귀양살이였다. ...(중략)... 그때 우리가 끊임없이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던 공동(空洞),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혹은 그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고만 싶은 구체적인 감정, 어이없는 요구, 저 불타는 화살과도 같은 기억, 그것이 바로 귀양살이의 감정이었다.
이 단락에서는 대단한 연쇄작용이 일어난다.
상실을 공간화하는 공동(void)이라는 표현
모순과 속도감과 시간적 이동이 느껴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고 싶은' 감정
시간의 선형적 이동 이미지를 이어가는 화살이라는 매개
오래된 방식의 전투를 연상케 하는 불타는 화살
역시나 오래된 격리(또는 추방) 방식인 귀양살이라는 표현.
귀양살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표현을 격리와 상실, 모순, 강압(폭력) 등을 아우르는 새로운 은유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렇게 귀양살이라는 관념은 강한 설득력을 갖고 독자의 의식 속에 안착한다.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이 단락 뿐만 아니라, 첫 챕터 전체에 걸쳐 페스트로 인해 폐쇄된 도시 속 사람들의 일화를 서술하면서 '귀양살이'라는 개념을 유기적으로 엮어 강화시킨다.
여러 개의 일화(anecdote)로 구성된 도입부
일화를 종합하여 요약하고 핵심적 관념을 제시
핵심적 관념에 입각해 일화를 재구성하여 해석
변주(i.e. 전통적 귀양살이와 '페스트 귀양살이'의 차이)
구체화 및 마무리
리뷰 논문이나 기획 문서의 개요라고 해도 무방한 구성이다. 이렇듯 견고한 짜임새는 강렬한 캐릭터나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이도 <페스트>의 서사를 지지하는 기둥이 된다.
인간에 대해 말하기 위해 질병이 가진 은유와 서사를 끌어다가 쓰는 경우와는 반대로, <페스트>는 질병이 소재이지만 인간이 화두인 작품이다. 페스트가 가진 특성들(공포, 격리, 전염 등)을 끌어다 쓰는 것이 아니라, 페스트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내면과 상호작용을 아야기한다. 그리고 그 화두는 대부분 사랑이다.
인간과 사랑을 잘 다룬 이야기가 좋다. 인간의 악의나 심연, 허무를 주제로 한 훌륭한 작품도 많다. 하지만 돌이켜보았을 때 기억에 남는 쪽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느껴지는 창작물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취향이지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 문장들
"공적인 일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러나 공공복지도 개개인의 행복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폐쇄된 시를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는 기자 랑베르가 서술자에게 한 말이다. 실제로 코로나 시기에 여러 국가에서 공적 제재와 개인의 권리 사이의 선을 찾기 위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 선의 정도나 방식 또한 사회마다 많은 차이를 보였다.
"네 마음과 인간의 법 사이 싸움은 풀 수가 없다. 미안하지만 다른 결말이 없어. 너는 산 채로 갇히게 될 거야."
"그러나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생사의 경계에 가까이 선 사람들이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은 고통이 고통인 줄도 모른 채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일이 흔히 있는 법이니 말이다.
위 문장은 그냥 마음에 들어서 가져왔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문장들
전보에 쓸 수 있는 문구들은 곧 바닥이 드러나고 말기 때문에, 오랫동안의 공동생활이라든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애욕 같은 것들이 '잘 있소. 당신을 생각하며, 사랑하오.' 같은 상투적인 문구의 정기적인 교환으로 급속히 축소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경우가 다 그렇다. 즉 결혼하고, 계속해서 또 좀 사랑하고 일을 한다. 사랑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어버릴 정도로 일을 한다.
"서로 사랑하고 있을 때는 말을 안 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사람이란 항상 사랑하지는 못하죠."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꾼이 있는 것 같다. 묘사를 잘 하거나, 서사의 리듬을 잘 만들거나, 캐릭터 빌딩이 뛰어나거나, 소재 선정 자체가 독창적인 경우 등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앞서는 구성과 전개를 말했지만, <페스트>에 나오는 인물들의 짤막한 대화 역시 좋은 부분이 많다. 카뮈가 탁월한 이야기꾼인 이유는, 대화를 잘 쓰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을 직접 서술하고 언제 인물의 입을 빌릴 지 구분한 결과물이 너무나 적절하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문 중 몇을 추려 인용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아! 선생님." 하고 그는 말했다. "마음 먹은 것은 시원하게 표현할 수 있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우려할 정도가 아니라 명백한 숫자들입니다."
"총독부에 명령을 요청하겠습니다."
"명령을 기다리다니! 상상력을 발동시켜야 할텐데?"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Illness as a metaphor | Susan Sontag
페스트 | 알베르 카뮈
손택이 다루는 주제나 문장이 부담스럽게 다가온다면 대담집 <>을 권한다.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의 퀄리티가 들쑥날쑥한 와중에 손택은 변함없이 깊은 답을 내놓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냥 너무 멋있다.
그래서인지 랑베르의 발언은 다소 <안티고네>를 떠오르게도 한다. 특히, 에서는 더 직접적이고 압축된 대사가 등장한다.
- 주요 온라인 판매경로에서 모두 품절. 중고를 구하거나 도서관을 이용해야 함.
- 다양한 곳에서 출판했지만, 이 버전을 읽고 참고함.